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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톡433 나그네가 순례자 되어 (2)

   익숙한 울타리를 벗어나는 행동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집을 벗어나지 말고 울타리 안에서 살라고 가르친다. 농경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는 태어난 곳에서 자라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공간 중심적 문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이주의 삶을 근본적으로 불편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념적으로 보수화되고 보수화된 이념이 주류가 된다. 

몽골인은 아이를 키울 때 작은 명주실로 발과 발목을 묶어 보폭을 줄임으로 속도를 지배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머니의 몸이나 방안에 가두어 놓고 키우지만 몽골인은 아이를 광활한 광야에 내놓는다. 다만 아이가 멀리 가지 못하게 행동반경을 좁혀둔다. 우리는 공간 안에서 그들은 속도와 시간 속에서 아이들을 키운다. 나그네는 공간 안에 머물지만 순례자는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 속에 머문다.

 

우리 공동체에는 어트겅토야라는 몽골 여성이 있다. 그녀는 우리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멤버다. 몽골학교에서부터 어린이집까지 스텝으로 섬기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둘 다 우리 몽골학교 출신이다. 작은 아이는 십 수 년 전 내가 몽골에 갔다 올 때 안고 들어왔으니 얼마나 오래된 인연인가?

이제는 두 자녀 모두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물론 한국에서 말이다. 그중 작은 딸은 미국 사람하고 결혼을 했는데 이제 곧 미국으로 가려는 모양이다. 머지않아 그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갈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흘러간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그곳이 어디든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몽골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삶이면 어떤가? 한 곳에만 멈추어 살면서 오직 여기만이 나의 집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세상을 넓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다. 나는 30년을 넘도록 그런 사람들을 보고 살았다. 그러니 내게 이주는 한낮 여행자의 일상쯤으로 여겨진다.

 

애급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성에 머무는 것은 나그네의 삶이다. 애급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오려는 삶이야말로 순례자가 사는 삶이다. 순례자로 사는 것이 복이다. 애급은 노예와 종의 삶이다. 애급에는 바로가 있고 그가 가르쳐준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이란 바로의 도덕이며 그의 관습이다. 그것을 바로의 문화라 한다. 바로가 가르쳐준 문화 안에서 노예들은 안정과 순응을 배운다.

바로는 그 이념을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들어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노예들에게 주입시키고 의식화한다. 노예들은 한발자국도 그 공간을 떠날 수 없다. 바로가 머무는 성안에서 그들이 나가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누가 바로의 성안에서 노예의 반란을 꿈꾸겠는가?

얄팍하고 알량한 권력과 돈 그리고 빵 부스러기를 나누어주며 고기가마에서 잘 익혀진 몇 점의 고기로 길들여진 노예들에게 바로의 존재는 곧 신이다. 누가 바로에게 저항할 것인가? 바로가 가짜이며 우상이고 위선이며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 누가 외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래된 관습과 전통이라는 이유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가치에 저항하지 못한다. 저항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만이라도 용인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그 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왜 교회와 우리의 종교는 그것에 절대 신앙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가? 수많은 금기와 규례와 예전과 절대무오라는 줄을 그어놓고 감히 접근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교권에 반대하면 안되는 이유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신학교는 최후의 보루임에도 이미 어느 세력이 지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세력은 어느 대형교회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신학교의 교수들은 그 교회에 줄을 서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무감각해진 파렴치한 현실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얼마 전에는 그 신학교에 귀인이 입학했다며 후배목사가 찾아와 넋두리를 하였다. 그 귀인은 독생자라니 어쩌니 하며 내가 가장 혐오하는 바로의 이념을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내뱉는 천박한 사람의 아들이기에 나는 그 귀인의 입학에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을 상대로 학교가 법정 싸움을 하지 않나 그 싸움에서 이긴 것이 무슨 큰 승리를 쟁취한 냥 여기는 신학교는 진리도 정의도 무너진 볼품없는 철밥통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할 것이다. 지치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과연 순례자의 길을 떠난 사람으로서 맞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의 곁에 머물기를 거절한 사람이다. 나는 광야를 선택했고 광야의 순례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바로가 만든 규칙과 도덕을 나는 더 이상 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홀가분한 여행자의 차림으로 지팡이 하나, 내 발에 맞는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작은 배낭하나면 족할 순례자로 떠날 것이다. 참견도 여기까지다. 하긴 그 참견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어제 밤에 꿈을 꾸며 나는 이렇게 가야함을 깨달았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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