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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20 몽골학교 이사는 우리가 합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주민 선교를 하면 전세계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도 많은 외국인 이주민들을 만나니 그들 민족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특징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몽골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먼저 몽골인들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이란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자신도 먹고 살기 힘이 들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먼저는 아픈 사람을 돌볼 줄 아는 긍휼의 마음이 있다. 이것은 유목민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목민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 자신이 먹어야할 것을 내놓고 나그네에게 먼저 먹으라고 권하는 모습은 유목민에게서만 볼 수 있는 문화다. 때때로 몽골을 방문하면 나섬공동체 출신의 몽골인들이 나와 일행을 초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그 사람들의 정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 감동을 넘어 때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대접이 융숭하다. 내가 서울에서 나누었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을 받게 되니 그럴 때면 서울에 돌아가서 더욱 열심히 나그네를 섬겨야겠다고 나도 모르게 다짐하곤 한다.

내가 뚝섬에서 나섬의 사역을 할 때에 우리 공동체에 드나들던 톨가라는 몽골 아이가 있었다. 그때에는 나도 정말 가난해서 어느 교회 지하실을 빌려 남의집살이를 할 때였으니 서럽고도  힘들 때다. 그때는 매일같이 갈 곳 없는 나그네들과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살았다. 그 톨가라는 아이도 매일같이 찾아와 함께 라면을 먹곤 했는데 하루는 그 아이가 혹시 라면 하나만 줄 수 없느냐 묻는다. 왜 그러냐고 하니 집에 아빠가 있는데 아빠가 라면 하나만 갖고 오라고 했단다. 나는 웃으며 네가 여기서 먹고 가는 것도 아까운데 집에까지 갖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농담 삼아 말을 하곤 아이에게 라면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렇게 해서 만나진 아이가 톨가다. 나중에 보니 톨가는 언청이였는데 그 아이의 부모가 아들의 언청이 수술을 해주려고 한국에 온 것이었다. 나는 언청이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으나 그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 톨가의 언청이 수술을 돕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몽골이라는 나라가 지금과 같이 크게 나에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언청이 수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막상 우리를 돕겠다고 나서는 기관이나 병원은 없었다. 사람들의 인심이 이리도 나쁜가 싶은 생각에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딱히 방법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수원의 아주대 병원 사회복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톨가를 데리고 병원으로 한번 오라는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곧바로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측에 아이의 진료를 부탁하고 사회복지사에게 꼭 도와달라며 간청을 하니 병원장님께 탄원서를 하나 보내달라고 하여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다. 언청이 수술이 그리 간단한 수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톨가로 인해 처음 알게 되었다. 마침내 언청이 수술이 결정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기 전 몇 가지 검사를 한 결과 톨가는 아직 너무 어려 마취를 하면 깨어날 수 없을 수도 있다며 수술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결국 아이는 언청이 수술을 하지 못하고 몽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 어요나는 러시아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몽골 국립대학교 음악학과장으로 재직하던 교수였다. 어느 날 그녀는 톨가를 데리고 우리 선교회를 찾아와 세례를 달라하여 나는 그 아이와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나는 언청이 수술을 꼭 해주고 싶었지만 결국 언청이 수술은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톨가는 아무런 수술도 도움도 받지 못하고 몽골로 돌아갔다. 그러다 1997년12월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치고 수많은 몽골 사람들이 몽골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한 가지는 우리 공동체에서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이다. 이 일을 위해 나는 1999년 5월, 생전 처음으로 몽골을 방문하였다. 그날 나는 우리 공동체에서 돌아간 많은 사람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크게 감격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몽골로 돌아간 자신들을 위해 울란바토르에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지금의 울란바토르선교교회다.
1999년 10월 5일 나는 아내와 울란바토르선교교회 창립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창립예배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머물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톨가였다. 언청이 수술을 해 주고 싶었지만 결국 수술을 받지 못한 톨가가 아빠와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서울에서는 성수동 쓰레기장에서 빈병을 분리하는 일을 하던 외국인 노동자 출신 톨가의 아버지는 한국에 오기 전 몽골군 대령출신의 고급장교였다. 아들의 언챙이 수술이 이뤄지지 않아 몽골로 돌아간 그는 몽골대통령궁의 경호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목사님, 서울에서는 목사님이 우리를 도와 주셨지만 여기서는 제가 목사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이곳 울란바토르에 오신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목사님의 선교를 도와 드리지요."
 
그날 톨가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생생한 한마디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0년 여름, 나섬의 성도들과 몽골학교 사역자들을 이끌고 몽골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톨가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날의 우리가 받은 대접은 아마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과분한 대접이었다. 몽골 경찰의 선도차량이 맨 앞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를 선도하고 버스의 앞뒤에서 호위차량이 비상등을 켜고 달렸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 그대로가 연출되었다. 울란바토르 중심가는 대단히 복잡했는데 우리를 태운 버스는 그대로 논스톱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달려 울란바토르 외곽의 근사한 호텔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그 호텔은 통째로 우리를 위하여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우리 일행이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니 이미 레스토랑에는 톨가의 어머니 어요나씨가 제자들과 함께 몽골의 전통 옷을 입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어 어요나씨가 이끄는 환영 음악회가 열렸고 레스토랑에는 최고급의 몽골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어디서도 받아볼 수 없는 정도의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오직 우리 일행만을 위해 특별히 연출한 일정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다시 몽골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곳에는 톨가의 어머니 어요나의 친정부모님이 살고 있는 큰 규모의 목장이었다. 정말 상상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위하여 유목민들이 말 길들이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마상쇼 그대로다. 그러더니 큰 암말 한 마리를 내 앞에 데려와서는 작은 새끼 말이 먼저 엄마말의 젖을 빨게 하였다. 잠시 후 새끼 말을 엄마말로부터 떼어놓더니 그대로 젖을 짜서 내게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내게 마시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평생 우유를 마시지 않은 내게 생 말 젖을 가져다주면서 마시란다. 야생의 그 초원에서 나는 생 말 젖을 마셨다. 한 대접을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나는 그날의 생 말 젖의 냄새와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고 감격한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생 말 젖을 마시며 웃고 즐기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이 몽골의 사람대접이다. 톨가의 아빠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는지는 그 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개척한 울란바토르선교교회가 몽골선교역사상 처음으로 몽골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곧바로 교회 밖에 네온사인으로 십자가를 세워 수많은 몽골인들에게 교회의 존재를 알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울란바토르선교교회는 울란바토르시장으로부터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가장 좋은 땅을 기증받아 교회를 건축했는데 그 교회가 지금 몽골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톨가는 나중에 다시 한국에 와서 언청이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수술은 울산 평강교회에서 도와주었다. 그때 울산 평강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허선교사님이 톨가의 언청이 수술을 돕는 가운데 몽골에 관심을 갖게 되어 몽골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 거르더크라는 곳에 교회를 세웠고, 지금은 허 선교사님 자신이 몽골 선교사로 파송받아 거르더크에 평화선교센터를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니 사람의 짧은 만남 안에 어찌 그리 깊은 섭리가  있는 지 놀랍기만 하다.
작은 사랑의 나눔은 큰 은총으로 돌아온다. 내가 한 일은 작은 나눔에 불과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작고 보잘것없는 사랑의 실천을 크게 보아 주셨다. 실패한 언청이 아이의 수술도 몽골선교를 위하여 소중한 가치가 있었던 거다. 뚝섬의 작은 지하골방에서 시작된 작은 사랑이 엄청난 역사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바로 선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그네에 대한 사랑과 나눔이 곧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창세기 18:1-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 그의 삶에 아들이 있을 것임을 예고받는 수태고지의 사건이 일어난 장면이다. 아브라함이 길가는 나그네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일어난 일들이다. 얼마나 극적인 만남인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극진하게 대접함으로 그에게 축복의 메시지가 전달된 것이다.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평생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소식이다. 그런 소식은 나그네를 영접하는 순간에 들려온다.

창세기 19장에도 창세기 18장과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길 가던 나그네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극진하게 영접하는 장면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받아 멸망하기 전날 나그네로 변장한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성에 들어갈 때에 마침 소돔성 앞에 있던 롯이 그들을 극진하게 영접했다는 이야기다. 나그네들을 밖으로 내 보내라며 문을 두들기는 술 취한 소돔성 사람들의 강압적 요구에도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딸들을 대신 내 보내겠다며 끝까지 나그네를 보호한다. 그날 밤 그의 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소돔성을 떠나라는 천사들의 소식을 듣는다. 나그네가 천사였던 것이다.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이 자신들을 극진히 영접한 롯에게 지금 즉시 소돔성을 떠나라는 특별한 구원의 소식을 전해준다.
 
마태복음 25:31-40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주민 나그네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우연히 길가는 나그네인가?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고 내버려두어도 되는 그런 존재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천사들이며 구원의 소식을 갖고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가? 때로 우리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여 바람 스치듯 만나고 떠나보내는 일상을 반복한다. 이는 어리석은 삶이다.
나그네를 비롯한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와 나눔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야 한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수없이 그런 경험을 했다. 나그네를 섬기고 선교하는 삶이 나중에 어떤 열매를 맺는 지를 몸과 삶으로 체험하였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규정한다.
나그네는 우리를 위한 하늘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이다. 그들은 천사로 때로는 예수님과 하나님으로 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제는 우리에게 안목과 통찰력이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려는 얄팍한 인간성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한다. 실패하는 이유는 인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섭리와 계획을 알아채지 못해서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정이란 숭고한 가치다. 그것을 유목민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진리다. 몽골인들은 한결같이 그런 정과 배려의 삶을 산다.
몽골의 고비사막은 척박한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남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에 찾아오는 모든 이방인에 대하여 열려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것을 줄줄 아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고비사막을 갈 때마다 유목민의 집을 일부러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그들로부터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배운다. 그들은 몸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우리의 스승일 때가 많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몽골인들은 강인하고 힘이 세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몽골인들은 힘이 장사다. 일본 스모 씨름의 최고는 단연 몽골인이다. 그만큼 몽골인들은 힘에 관한한 천하무적이다. 우리 공동체는 매년 외국인 체육대회를 하는데 줄다리기 시합 때 있었던 일이다. 마침 몽골과 필리핀이 붙게 되었는데 그때의 장면은 정말 잊지 못할 코메디였다. 줄다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리자마자 한쪽 편의 필리핀 사람들이 모두 반대편으로 날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같은 숫자로 경기를 하였는데 말이다. 몽골인들은 힘에 있어서 전세계 어느 누구와도 대항할 사람들이 없다.
그런 연유로 몽골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직종이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것이다. 얼마 전 나도 오랜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이삿짐 직원들 중 두 명이 몽골인이었다. 그 두 명 중 한명은 우리 몽골학교와 나섬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몽골학교를 건축하고 이사를 할 때의 일화는 너무 즐거운 기억이다. 2014년 9월, 광장중학교 골목 끝의 옛 건물에서 지금의 몽골학교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건축을 마무리하고 이사를 하게 되니 참 기분이 좋고 감사했다. 그러나 이삿짐이 너무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는 거다. 2003년에 건축을 하고 11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으니 이삿짐이 끝도 없이 많았다. 어떻게 이 많은 이삿짐을 나를 것인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피아노만 해도 대여섯 대였으니 누가 그 무거운 피아노를 새 건물로 나를 것인가?
지금의 몽골학교는 연건평 900평인데 지하에서부터 지상 3층까지 짐들을 분리하고 자리를 잡는 데에 만도 엄청난 일꾼이 필요했다. 사실상 이삿짐센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이사를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려면 엄청난 비용을 들어야한다. 트럭으로 오고가는 것만 해도 상상 못할 비용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리 학교 학부모들 중 상당수가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학교가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부모들끼리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의논을 하더니 학교 이사는 모두 자기들이 맡겠다고 한다. 물론 무료로 말이다. 자신들이 직접 차를 가지고 와서 이사를 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사를 하던 날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장 높은 층에 있던 피아노를 단 두 명이 간단하게 둘러메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층으로 뛰는 거다. 우리 스탭들 중 남자들만 한 열 명 쯤 붙어도 들까말까 하는 그 무겁고 오래된 피아노를 무슨 박스 하나 들듯이 들어 옮기는 거다. 수일에 걸려 해야 하는 이사를 한 나절 만에 간단히 해치워버리는 그들의 힘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혀를 내둘렀다. 힘이 센 몽골 남자들을 보면서 나를 비롯한 우리 남자 스탭들은 왜 그리 작아지던지...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는 몽골 학부모들도 즐거운지 이사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새로 짓고 이사를 한다니 그렇게나 좋았던 모양이다. 내가 고맙다해야 하는데 그들이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 한다.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좋은 학교를 만들어 주어 너무 고맙다며 언제든 짐을 나를 일이 있으면 자신들을 부르란다. 내가 고마운지 그들이 고마운지 우리 모두는 감사를 연발했다. 서로 감사를 주고받으며 이것이 천국의 모습이겠구나 생각하였다.

광장동 광장중학교 후문 골목끝자락에서 한강이 보이는 아차산 중턱의 멋진 몽골학교로 이사를 하면서 지난 11년간의 몽골학교를 돌아보았다. 2003년 광장중학교 후문에 몽골학교가 아닌 외국인근로자선교회의 선교센터를 세울 때가 생각난다. 당시 나섬은 서울외국인그로자선교회라고 불렸는데 구의동 테크노마트 앞 유치원의 지하실에서 살고 있었다. 1997년 10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지하실에서 정말 두더지처럼 살았다. 아침에 지하 교회로 들어가면 하루종일 위로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 나는 그냥 지하실이 내 삶의 공간이려니 하며 살았다. 그러다 몽골학교를 시작하고 점점 불어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공간을 찾아다니다가 광장중학교 후문의 개인주택을 매입해 그곳을 몽골학교로 사용하다가 1년 쯤 지나 개인주택을 허물고 건축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도 우리가 건축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100평의 대지에 지하 2층 지상 3층의 건물을 짓기로 하고 아무런 재정적 준비도 없이 건축을 시작하였다. 대지가 넓지 않으니 지하를 깊이 팠는데 마침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수도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지하 13m를 파내려갔으니 옆집은 어떠했겠는가? 비가 내려도 너무 많이 내려 공사를 못할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계속 비가 오면 옆집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싶으니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름 내내 그토록 비가 많이 내리니 공사는 지연되고 돈은 없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에 나의 눈에 다시 문제가 생겼으니 포도막염이 재발한 것이다. 내 눈에 처음 문제가 생긴 것은 1994년 5월이었고, 시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1999년에는 치료가 되었다 하여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작은 건물을 하나 짓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 눈의 문제가 재발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건축을 해야 했다. 결국 엄청난 고생 끝에 광장중학교 후문 골목 끝에 선교센터를 지어 몽골학교로 사용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 정말 넘치는 축복의 공간이 바로 그 골목 끝 몽골학교 자리다. 그곳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기쁨도 슬픔도 모두 내 삶의 소중한 흔적으로 뚜렷하게 남아있다. 우리 몽골아이들도 그곳에서의 삶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소중한 곳이었다.

그런데 골목 끝 몽골학교는 운동장이 없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운동장은 골목이었다. 골목에서 줄넘기도 하고 공놀이도 하며 뛰어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광진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학교 아이들 하고 광장중학교 아이들이 싸움을 해서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담당 스텝들과 선생님들이 광진경찰서에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긴 하였지만 정말 큰 사건이 생긴 것이다. 광장중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로 달려와 내 방에서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던지 말이 아니었다.  
사건의 경위는 대충 이랬다. 광장중학교와 우리 학교 사이에는 골목이 있었는데 마침 광장중학교 3학년 학생들 8명이 그 골목으로 걸어오고, 우리 학교 쪽에서 4명의 몽골 아이들이 걷다가 골목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그쪽은 중학교 3학년이니 덩치도 크고 숫자도 8명이었고, 우리 쪽은 몽골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인데다 덩치도 작고 숫자도 4명에 불과했다. 광장중학교 학생들이 마주친 몽골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야 몽골 거지새끼들, 너희 나라로 가!'라고 했단다.

"이놈들아 왜 싸움을 해? 너희 부모님들이 힘들게 일하고 고생해서 공부시키는데 열심히 공부해야지 왜 싸움을 하니? 말해봐라."

왜 싸웠느냐고 내가 혼을 내주면서 아이들에게 물었을 때,
 
"광장중학교 아이들이 우리에게 몽골거지들이라며 몽골로 가라고 했어요."

그날 나는 그 말을 우리 아이들에게서 들었다.

복도에서 그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하고 내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몽골거지새끼들이라는 말을 듣고도 싸움을 안했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라 생각했다. 잘 싸웠다고 칭찬은 못했지만 나는 그 싸움의 발단이 어디서부터였는지를 듣고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싸움에서 우리 몽골 아이들 4명이 광장중학교 학생 8명을 상대로  코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 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일로 그쪽 학부모들이 경찰서에 고발을 하고 병원비 등 위자료를 엄청나게 요구를 해서 우리는 그 후에도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었다. 가까스로 합의를 하고 문제는 종료가 되었지만 그 사건은 나에게 그 골목에서 있었던 기억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어떻게 몽골 아이들 4명이 그것도 키도 작고 덩치도 크지 않은 작은 몽골아이들이 덩치가 큰 중학교 3학년 학생 8명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었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말 가능한 싸움일까를 혼자 곰곰이 생각하니 웃음만 나온다. 하긴 골리앗과 다윗도 그랬다하지 않던가?

창세기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나는 그 골목 끝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교실을 만들었다. 컨테이너 교실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그 공간에서 몽골 아이들은 더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때로 가난하고 약한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당하고 소외되어 마음이 아픈 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그 골목 끝 컨테이너 학교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했다. 시력을 다 잃어버린 목사와 갈 곳 없는 몽골아이들이 살았던 그 중학교 골목 끝 컨테이너 학교를 나는 잊지 못한다. 영원히 내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나는 그곳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나는 그곳에서 가난하고 약하지만 작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섭리와 은총을 몸으로 경험했다. 나는 그 골목 끝 몽골학교에서 나섬이 세계를 품는 공동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에게 그 골목 끝 작은 학교와 나섬의 사역지는 광야로 나아가 처음 하나님과 만나 약속을 했던 야곱의 벧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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