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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13 아버지와 나 그리고 몽골학교(1)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나의 아버지이신 고(故)유정준 장로님은 내 인생과 사역에 있어 가장 소중한 분이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도 보고 싶고 사무치도록 그립다. 아버지는 몽골학교 기공예배를 드리고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얼마 되지 않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나라로 떠나가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참 건강한 분이셨기에 단 한 번도 아버지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몽골학교 기공예배를 드릴 때까지도 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공사현장에 나와 이런저런 자문을 해 주셨다.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자식이었을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진학할 대학과 전공과를 선택할 기로에 있을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부 연합 여름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부터 나는 조금씩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장로님은 내가 장차 법을 전공해 법조인의 길을 걷길 원하셨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견해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신학을 전공하는 것에 대하여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신학교에 가는 것은 아버지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강하게 장로회신학대학 입학을 원하였으므로 아버지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한바탕 내 진로 때문에 충돌이 있은 후, 아버지는 기도원에 들어가셨다. 자신이 기도하고 직접 하나님께 묻고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아무말씀 없이 나의 결정에 동의하셨다. 그 후 나는 아버지의 기도와 무언의 동의하에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장신대는 지금 내게 너무도 소중한 학교다. 그러나 처음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장신대 입학을 후회했다. 내 선택에 대한 후회였을까, 아니면 장신대 자체에 대한 고민이었을까? 어째든 장신대 입학과 동시에 나의 후회와 방황은 시작되었고 신학교 생활 내내 이어진 나의 방황은 아버지를 무척 힘들고 아프게 하였다. 나는 신학교 입학 후 곧바로 학교를 그만둘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학교 공부와는 관계없는 철학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그쪽의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학교생활은 무척이나 답답했고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스스로 소외와 자폐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당시의 동기들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물론 가까운 친구도 없으니 그 방황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이다.

 

결국 학부 1학년 한학기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하기로 마음을 먹던 중 아주 우연히 장신대 직원으로 계시던 지인 한분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였다. 5월 중에 군목후보생 시험이 있는데 유 전도사에게 그 시험을 한번 치르게 하면 어떻겠냐고 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에게 시험 신청을 하라시며 군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풀이하여 내게 강조하셨다. 아버지의 부탁 아닌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그냥 한번 시험을 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시험을 치렀다.

그 해 5월 초순경 감리교 신학대학이 있는 서대문 냉천동까지 가서 시험을 치러야하는데 우리 집이 있는 경기도 하남시에서 서대문 감신대까지는 얼마나 멀던지 시험에 늦지 않기 위하여 아침 일찍 택시를 탔다. 택시가 출발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기사가 합승을 하자 하기에 그러라 했다. 조금 지나지 않아 승객 한사람을 태우고는 종로를 가자고 하기에 그러라 했다.
그 택시는 종로 어딘가를 돌고 돌아 그 승객을 내려놓고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감신대에 도착을 하였다. 보아하니 시험시간이 이미 30분이 지난 후였다. 시험을 볼 수 없겠구나 싶었다.
수험표에 찍힌 번호를 찾아 교실로 들어가니 이미 시험은 시작되어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시험을 보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시험 감독관이 나를 보고는 짜증도 아니고 혼을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심하게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한마디를 한다. 시험을 볼 수 있겠느냐 물으니 그 사람 왈 이미 시험이 시작되어 당신이 지금 시험을 봐도 합격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그래도 기회를 달라하니 한 자리를 가리키며 그 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라한다. 시험지를 받고 정신없이 답을 채웠다. 영어시험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논술까지 시험을 보고 곧바로 면접을 하였다.
어떻게 시험을 보았는지 정신없이 하루를 지내고 나는 다시 고민과 방황 속에 한 학기를 보내었다. 학교는 이미 마음을 접은 상태로 학교를 떠나는 것만이 답이라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가고자 했던 학교였으니 아버지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아버지에게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언제 말씀을 드릴까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전화 한통을 받고는 너무도 좋아하셨다. 장신대  지인으로부터 군목시험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군종장교후보생이라는 특별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에 군목후보생은 장신대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돈이 없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으며, 학교로부터도 군목후보생이라면 조금은 대우가 좋아 보였다. 우리 동기생들 중 12명이 합격을 했는데 장신대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가 합격을 했다 한다. 학교를 그만두려 했는데 그만 군목시험에 합격을 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바뀌었다. 이왕 학교에 입학을 했고, 그것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선택하여 찾아온 학교니 그만두는 것은 아버지에게나 나 자신에게 명분도 없고 대안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목표는 오직 하나 하루빨리 장신대를 졸업하는 것이다. 빨리 졸업하면 학교를 짧게 다니는 것이니 그렇게라도 타협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께는 내가 기특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후로 나는 공부에 집중을 하고 모든 시험에 단 한 번도 떨어지는 법 없이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성경종합시험, 언어종합시험, 장신대 신대원 편입시험 등등. 그리고 우리 동기 군목후보생 12명 중 유일하게 1987년 군목이 되었을 뿐만아니라 1987년 2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지 딱 일주일 만에 나 홀로 목사안수를 위하여 임시노회가 열렸다.
나 홀로 목사안수를 위하여 임시노회까지 열렸으니 아버지 장로님이 무척 좋아하셨다. 당시 내 나이 26살이었다. 만나이로는 24살에 목사가 되었으니 그 당시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잘난 척하였을까 싶다. 정상적인 신학과정을 밟아 그 나이에 목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그때도 없었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었다.

나의 군목시절은 아버지 장로님에게 어땠을까? 어딘가에도 고백했듯이 나의 군목시절은 거의 외줄 타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했던 시간이었다. 겁 없는 운동권 군목의 모습이었다. 보안부대도, 계급도 관심 없는 그저 막가는 육군 중위 군목이었다. 아버지는 무척 불안하셨을 것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마음 졸이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죄송하고 창피해진다. 그때를 생각하면 철없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정말 당당하고 겁 없고 무서운 것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군복도 입지 않고 계급장도 달지 않은 채 야전잠바를 입고 군 생활을 했다. 연대장 사무실에 들어가는 날에도 나는 군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연대장실에 들어가니 연대장이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군복을 입지 않고 군 생활을 하던 사람은 유일하게 보안부대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복차림으로 연대장을 만날 정도였으니 내 군 생활이란 어떠했겠는가?
그렇게 군목시절을 보내는 나를 보고 아버지 장로님은 항시 불안하셨을 거다. 그러면서도 나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도 갖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나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군 생활에 대하여 책망하거나 걱정하시는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언젠가는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나를 바라보셨던 것 같다. 그렇게 사랑은 걱정도 기대로 바꾸는 모양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아버지 장로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유독 나의 아버지는 나에 대한 한없는 기대와 사랑으로 사신 분이다. 내가 군목을 전역하면서 당장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적이 있었다. 1990년 7월 전역을 하니 주변의 가까운 선배들과 나를 아끼는 분들이 나의 미래를 걱정하며 여러 가지로 조언을 해 주었다. 나를 아끼시는 한 선배 목사님은 당신이 책임져주시겠다며 어느 대형 교회 부목사로 가라고 하셨다. 아마도 대부분의 목회자가 가는 길이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르고 싶었고 고집스럽게도 최고가 아니라 최초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참으로 젊은 목사의 치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 철학이며 신학이다. 정말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걷고 싶었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창조적인 목회와 선교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결단과 철학의 이면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 뒤에 아버지 장로님의 무언의 지지와 기대가 있었다. 걱정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무한한 사랑이 있었던 거다. 나와 아버지만이 주고받는 영적 교감이 있었다. 사실 아버지 장로님은 나의 미래에 대하여 한 번도 걱정하시거나 압박감을 주신 적이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며 나의 선택에 맡기시려 했다. 내가 군목을 전역하고 곧바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다 했을 때도 아무런 반대가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눈만 봐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시골의 농부이며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셨다. 평생 땅을 파고 씨를 뿌리는 농부였으며, 오직 몸으로만 당신의 삶을 영위하였던 노동자셨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 농부와 노동자는 위선과 허위의 삶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땀과 피와 눈물의 대가만으로 살아야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풍요롭게 살지는 못해도 위선이나 허세를 떨며 살지는 말라 하셨다. 굳이 말씀으로가 아닌 삶으로 나를 가르치셨다. 그래서였을까 내 아우 유호식 집사와 나는 아버지에게서 정의로움과 저항을 배웠다. 내 동생 유 집사는 학생운동으로 대학시절을 보냈고 나는 비겁한 장남으로 운동권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존경하고 닮아가고 싶어 했던 두 아들을 아버지 장로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품어 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했음에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웃기만 하셨다.

1992년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이 시작되던 때에 나는 이주노동자 선교를 하기로 하고 구로공단에 들어갔다. 미국 유학을 결정한 뒤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까지 받기로 약속된 미국행을 포기하고 구로공단으로 들어가는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무척 아프셨을 거다. 힘드셨을 거다. 편한 길을 외면하고 자꾸만 광야로 나가려는 아들을 보시며 그 길은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왜 하필 이주노동자 나그네를 선교하고 목회하려느냐고 묻고 싶으셨을 거다. 미국이 더 좋은 길이고 그 길이 아버지가 원하는 길이라며 나를 설득하고 싶으셨을 거다. 아들의 길이 아버지가 원하는 길과 다를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아들이 가려는 길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님을 아는 아버지라면 그 아들의 길을 지지할 수 있을까? 세상의 거의 모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길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 장로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길이 맞는 길이라 생각하셨을까마는 아버지 장로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성을 쌓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세속화된 교회와 목회 환경에서 굳이 길을 만드는 삶을 선택하려는 아들에게 어느 아버지가 동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내 아버지는 자랑스럽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들의 인생에 대하여 인간적인 성공을 원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마는 내 아버지는 그 성공보다 내 결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해주셨다. 뿐만아니라 내가 구로공단에서 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시력이 떨어지는 절망의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셨다. 나를 데리고 기도원을 전전했으며 전국에 눈을 치료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서슴없이 나와 동행하셨다. 새벽마다 나를 위하여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셨다. 내가 울면 함께 우셨고 내가 웃으면 당신도 기뻐하셨다.

눈에 병이든 나는 더 이상 구로공단에 머물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를 지원하던 소망교회와는 결별하게 되었으며 함께 동역하던 이들과도 작별을 고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이 더 강한 구로공단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때에 만나고 함께 동역하던 이들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패배한 운동권의 추억이 전부다. 그곳에 살던 이들은 그런 얼치기 운동권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들도 그랬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도 지금 역사가 그것을 안다. 내가 나오고 그 안에 있던 이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모두가 패배한 운동권이 되었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하며 정치적 성공의 길을 선택한 그곳의 선배 목사님의 전향도 보았고 그분은 그렇게 전향했음으로 성공한 목사의 반열에 올랐지만 어느 누구도 그분을 존경하지는 않게 되었다. 나도 그분을 존경할 까닭이 없으며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커다란 상처를 주고받았던 구로공단의 추억만 있을 뿐이다. 그 후 나는 내발로 그곳을 찾지 않았다. 너무도 큰 상처를 받았고 배반을 당해야했음으로 나는 그 선배의 이름과 모습만을 기억할 뿐이다. 가끔씩 언론에 나와 인터뷰 하는 그 선배 목사님의 음성을 듣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생각뿐이다. 아마 그렇게 살아도 세상은 그분을 성공한 재야인사라 부른다. 사실 그분의 속사정을 알면 그렇게 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내가 확 불어버릴까도 싶었지만 이제는 관심이 없다. 나도 늙어 가는가 보다.
 
1994년 12월까지 구로공단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곳은 성수공단이었다. 뚝섬의 골목마다는 작은 가내공장이 수두룩했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나그네들이 살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성수공단의 골목을 돌아 다녔다. 뚝섬의 어느 교회 지하골방에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시작한 나의 두 번째 나그네 사역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돈은 없었고 그래서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성수동 시절이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아버지 장로님의 역할이 시작된다. 농사꾼 아버지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땅에서 나오는 푸성귀 같은 것들이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더듬더듬 살아가는 아들을 보시며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던지 그 안타까움은 아버지의 눈물과 땀으로 나에게 찾아온다.
호박과 오이와 배추 같은 온갖 채소를 직접 심어 나그네들의 먹거리로 가져다주기 시작하셨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심어놓은 푸성귀 사이에 앉아 젓가락으로 벌레를 잡고 계셨다. 농약을 뿌리라 말씀을 드리면 나섬 식구들이 먹는 것인데 어떻게 농약을 치느냐며 해맑게 웃으시곤 했다. 지금도 그 아버지의 잔잔한 미소가 그립다.
가을이면 직접 키우신 배추와 무로 김장을 했다. 때로 천포기가 넘게 김장을 하는 날이면 우리 공동체는 잔칫날이요 천국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농사는 계속되었다. 지금은 늙으신 어머니 권사님이 홀로 그 힘든 농사를 짓는다. 꼭 아버지처럼 어머니 권사님이 지금은 내 동역자인 셈이다.

뿐만아니라 경기도 양평의 다문화생태마을은 아버지 장로님의 땀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거친 야산을 오직 맨손으로 일구고 만들어 주셨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이런 노동뿐이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나무를 심고 돌을 캐내셨다.
길을 내고 블루베리를 심어 주셨고 그 블루베리는 지금 우리 공동체의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버지의 헌신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보고 살았다. 아버지의 거친 손마디를 붙잡고 그 땀으로 살았다. 그분의 단내 나는 숨 냄새를 맡으며 나는 존재했다. 내 인생과 나섬에서 아버지는 영원한 동역자이며 절대적 존재다. 그분을 잊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는 가슴에 남아 나를 깨우치고 가르치신다. 내가 흔들리고 방황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그냥 웃고 계신다. 꿈속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그 모습을 뵙게 되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며 사랑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동역자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나는 운다.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고마워 잊을 수 없어 그리워 운다.

 

창세기 37:5-11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아들은 아버지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은 죽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다 알 수 없다. 그런 아들은 지금 아버지 장로님을 그리워한다. 힘들고 외로운 날이면 그냥 아버지를 부르고 싶다.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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