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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굿모닝몽골4 재한몽골학교를 세우다(3)

창세기 28 : 10-15

:10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28: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28: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28: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28: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28: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가족과 함께 살던 장막에서 광야의 노숙자로 쫒겨났을 때에 그는 노숙하던 빈들에서 천국 사닥다리의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였다.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진 사닥다리와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야곱은 노숙의 현실에서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오직 성공에 대한 집념과 의지만 있었던 그가 성공이라는 현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커다란 진리를 경험한 것이다.

나는 야곱을 사랑한다. 나도 야곱처럼 살고 싶다. 야곱처럼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한계 즉 장자가 아닌 차자라는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어 상속권과 축복권을 얻고 싶다. 그래서 남다른 축복의 삶을 누리고, 그렇게 내 삶에 한없이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를 거둬내고 싶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운명이 결정된다. 흙수저가 될 지 아니면 금수저가 될 지는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 운명처럼 결정되는 그 현실은 이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견고하다. 예를 들어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게다가 부잣집 장자로 태어나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타고 낳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느 날 우리 몽골 학교 학생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목사님, 저는 왜 몽골에서 태어났을까요? 만약 내가 한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요. 또 우리 엄마와 아빠는 왜 한국에 이주 노동자로 살고 있을까요?"

 

그 아이는 운명처럼 주어진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절망의 현실이 그 아이에게는 너무도 커다란 담이며 짐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세계를 지배하던 몽골제국의 후손이지만 지금은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그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있었다.

몽골 아이들은 대부분 몽골을 사랑한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민족과 조상들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우리 아이들에게 예배 설교를 할 기회가 있는데 그때마다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몽골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특히 몽골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몽골을 사랑할 줄 알아야 미래의 지도자가 된다고 가르친다.

몽골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면 자존감이 부족해진다. 인간이 자기애가 없을 때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인생은 사실 불행해 질 가능성이 높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기보다 그 운명을 타고 넘어가려는 열망이 있으면 주어진 운명은 오히려 사닥다리가 된다. 운명의 사닥다리를 타고 하나님을 만나 그것이 운명을 바꾸는 사닥다리가 될 때에 인간은 드디어 성공하는 것이다.

야곱에게 운명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장자가 아닌 차자의 운명 말이다. 쌍둥이 형제의 운명은 누가 먼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야곱이 에서의 탯줄을 붙잡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그가 어머니의 태속에서도 장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리라. 그러나 어찌하랴. 운명은 그가 장자가 아닌 차자로 태어나게 한 것이니 말이다. 작은 아들은 큰아들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속과 축복의 조건에서 결정적으로 밀려난 존재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은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운명이란 마치 내가 한국인으로, 우리 몽골 아이가 몽골인의 자녀로 태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다. 태어난 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니 그것은 운명이다.

부잣집이 아닌 가난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사람이 아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내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니 그것도 주어진 운명이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 그 운명에 포로 되고 그 안에서 머물다 세상을 떠난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렇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도 원망한다.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느냐며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는 자녀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탓하고 운명을 저주한다면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만족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 중 자기가 태어난 조건에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열등감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모두 자신보다 우월한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인생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탓할 테니 모두가 불행해질 뿐이다.

한국이 아닌 몽골에서 태어난 것을 탓하고,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탓하며, 나보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저주하는 인생들로 채워진 세상살이는 불행할 뿐이다.

 

후에 벧엘이라고 불린, 야곱이 사닥다리를 체험했던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탓하고 저주했을까? 큰 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작은 아들로 태어나 모든 상속과 축복의 조건에서 멀어진 열등감으로 가득했을 한 청년의 고뇌를 생각해 본다. 노숙자로 전락한 한 청년의 한없는 절망도 상상해 본다. 그것은 오늘 우리 자신이다. 내가 처음 강변역 지하실에서 외국인 노숙자들과 밥을 나누었을 때에 만났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꼭 그랬다.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여기서 밥을 먹고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답하던 몽골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는 야곱처럼 보였다. 학교도 다닐 수 없는 한국이라는 광야의 한 복판에서 졸지에 외환위기를 당하고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우리 공동체뿐이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또 신비롭다. 그 아이들에게 나섬은 야곱의 사닥다리였던 것이다.

 

창세기 32 : 27 - 28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32: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1)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운명의 사닥다리를 타고 성공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운명이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단서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뀌었듯이 말이다. 사울이 바울로 바뀐 것도 그렇고, 게바가 베드로로 이름을 바꾼 것도 운명을 바꾼 이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은총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운명의 항로를 변경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목적이다. 운명에 포로 되고 그 운명을 탓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한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 이루고 싶은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

나는 지금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이니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시각장애의 현실을 탓하고 그 주어진 조건 안에 매몰되어 괴로워만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장애인 리더였던 강영우 박사를 만나 아침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서울시청 인근의 어느 호텔에서 강 박사님과 아침식사를 하던 중 나는 이렇게 물어 보았다.

 

강 박사님 그동안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사셨습니까? 저는 지금 시각 장애를 가진 것이 불과 몇 년이지만 평생 눈이 보이지 않은 가운데 사신 강 박사님은 정말 힘이 많이 드셨겠군요."

"목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눈이 안보여 성공한 사람입니다!"

 

아침밥을 먹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씀하시던 강 박사님이 생각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아침밥을 나누며 하던 그 이야기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화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강영우 박사의 그 한마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메시지였다.

장애가 성공의 사닥다리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오늘 자신을 이렇게 세계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준 조건이 되었다고 했다. 성공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타고 올라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이 성공이 아니다. 오히려 몽골인으로 장애인으로 혹은 가난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그것을 타고 올라가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한 사람이 곧 성공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 몽골 아이들에게 종종 말한다. 결코 지금 주어진 현실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몽골에서 태어나 한국의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말해 준다. 너희들의 조상 중 칭기즈칸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이야기 해준다.

칭기즈칸은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라는 부족으로부터 암살을 당해 어릴 적부터 가난과 수많은 위기에 부딪혀야 했다. 칭기즈칸은 그런 자신의 형편을 탓하지 않았다고 한다. 들쥐를 잡아먹으며 살아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몽골이라는 작은 부족의 어린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그가 위대한 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을 타고 올라가 마지막에는 초원의 모든 부족을 하나의 우산 속으로 모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예케 몽골 우루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위대한 몽골의 나라!'라는 말이다.

나는 몽골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며 몽골이 얼마나 위대한 나라였으며 몽골의 칭기즈칸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갑자기 얼굴의 표정이 달라지고 마치 자신이 칭기즈칸이 된 것처럼 허리를 펴고 자신감을 갖는다.

몽골학교가 지금은 미미하다. 정말 존재감 없는 학교다. 우리나라에 이런 학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해 보면 몽골학교를 만들겠다고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무모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에는 황당한 것이리라.

 

얼마 전 은퇴하신 정영섭 전구청장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 자리에는 유승주 전의원도 함께 했다.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몽골학교를 만들고 지하실에서 오갈 데 없이 살아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때에 구청장님이 우리를 얼마나 도와 주셨는지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솔직한 고백이다. 정 구청장님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분은 몽골학교와 나섬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분이다.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니 구청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나는 목사님을 감당할 수 없는 분이라고 보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와 드린 것이죠."

 

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미친 사람처럼 살아가는 내가 정 장로님께 그렇게 보였나보다. 그리고 구청장님은 한마디를 더해 주셨다.

 

"여기 우리가 몽골과 한국을 이어주는 다리를 만든 역사의 장본인들입니다. 한국과 몽골의 다리는 우리가 만든 것이죠."

 

1999년 몽골학교를 세우고, 2001년 몽골 울란바타르문화진흥원이 세워진 것, 다시 광진구청과 울란바토르시 항얼구의 자매결연에 이르기까지 모두 광진구 안에서 그것도 정 구청장님과 함께 만들었다. 서울시 교육청과 울란바토르 교육청과의 자매결연도 우리가 주선하였으며, 그 외에도 몽골로 진출하려는 기업을 몽골에 연결시켜 비즈니스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 경우는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몽골에 한반도 통일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평화 선교 센터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욥기 8 : 7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살면 실족하고 어리석어 넘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살고 싶다. 더욱이 내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본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본다는 것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면 차라리 안 보이는 것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며 살았다. 어차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꿈꾸고 살아야 한다면 현실의 눈은 이미 내게 가짜다.

이제는 정말 보이지 않는 세상과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 그것은 때로 실체가 없어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진실 되며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보석 같은 것이라고 믿고 도전해야 한다.

야곱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성공의 끝자락에서 다시 가족들과 해후하듯이 우리도 그런 날을 꿈꾸며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13 : 31 - 32

31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지금은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 겨자씨가 겨자나무가 될 것을 상상하며 오늘의 한계를 뛰어넘어서야 한다. 마침내 그날은 올 것이다. 그 미래는 지금 여기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야곱이다. 나는 이스라엘이다. 나섬과 몽골학교는 야곱의 사닥다리를 체험한 공동체다. 우리는 광야에서 사닥다리를 본 야곱처럼 미래를 꿈꾸었고 그 미래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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