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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노마드경제22 요단강을 건너려면 계산을 중단하라

여호수아 3 : 6 - 17 

 

 

앞에는 요단강이 범람하고 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은 강 건너 마을이다. 가나안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으니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런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그 땅을 가지 못했다. 강물이 넘쳐흐르는 두려운 현실과 장벽 앞에서 인간은 머뭇거리며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면 아니 멈춰버리면 지금까지의 수고는 헛것이 된다. 왜냐하면 정작 목적지는 모압이 아닌 가나안이었기 때문이다. 광야가 목적지가 아니라 가나안 땅이 목적지였다. 그 땅은 여기가 아니라 바로 요단강 건너편의 땅이다.

그런데 그 요단강이 범람하고 있다. 너무 많은 강물로 강이 흘러넘친다. 넘치는 강은 무섭다. 잘못하면 떠내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모세가 지팡이로 바닷물을 내리쳤다. 지팡이로 내리치는 일은 쉽다. 나대신 지팡이가 움직이니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요단강 앞에서의 명령은 다르다. 지팡이가 아닌 몸을 내던지듯 그냥 대책 없이 몸이 앞으로 나아가라 하신다. 앞발을 강물로 내려 지팡이가 아닌 몸이 들어가라 하신다.

지팡이는 물건이지만 몸은 생명이다. 목숨이다. 지팡이는 버릴 수 있지만 몸은 죽는다. 요단강의 물살을 이겨낼 수 없다면 몸은 떠내려갈 것이며 그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을 담보로 요단강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일까?

 

몸이 움직이려면 머리가 명령을 해야 한다. 그런데 머리는 좀처럼 움직일 것을 명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머리는 계산하고 이해관계를 따지며 죽을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보호 장치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답이 없다. 머리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연산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머리는 굴리고 그 굴리는 머리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과연 믿음은 머리와 몸 사이에서 어떤 힘을 작동하게 하는가? 믿음은 몸과 머리 중 어느 부위를 종용할 것인가? 머리는 믿음의 영역을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견제한다. 몸이 발달한 사람과 머리가 발달한 사람이 있다. 어떤 부위가 발달되었는가에 따라 우리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한다.

믿음은 몸의 영역을 따라가라 한다. 몸은 머리보다 앞설 수 없지만 오직 믿음의 영역 속에서는 몸이 머리보다 앞설 수 있다. 믿음이 몸을 머리로부터 떨어지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단강이 갈라지려면 머리로는 불가능하지만 몸으로는 가능하다.

이성은 우리가 잘 사는 길은 합리적이며 경제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며 논리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잘 사는가 보다. 그러나 신앙은 이성과 다르게 합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이성과 충돌하고 때로는 심각한 갈등을 일으킨다. 이성과 신앙은 서로 다른 길을 바라보며 달리는 기차처럼 평행선을 달린다.

요단강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성과 신앙의 갈림길은 딜레마다. 하나님은 요단강 물에 빠져들라고 하신다. 반면에 머리라는 이성은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말리려 한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라. 과연 요단강 물에 몸을 던지는 것이 합리적이며 경제적인 것이냐고 말이다.

신앙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 가르친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진정 승리자의 삶은 어떤 명령과 결단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세상이 모두 합리적이며 경제적인 길을 통해서만 성공하고 그 선택만이 가장 확실한 승리의 길임을 말하고 있다면 이성과 과학이 인간의 역사를 통제하는 것은 마땅히 옳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 때로 가끔 그럴 수는 있지만 그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의 합리성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우리의 이성적 판단기준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것이다. 이성과 합리성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은 몸으로만 가능하다. 몸은 전적인 헌신이다. 몸을 던져야 요단강이 갈라진다는 사실은 전적인 헌신을 넘어 죽음까지 전제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요단강을 가 보았다. 그날 나는 요단강을 바라보며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이 난감해했을 그 명령을 생각했다.

과연 나라면 그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고민했다. 그들은 몸을 던져 요단강을 갈랐다. 이성보다 몸이 우선이어야 할 때가 있다.

머리로 계산하는 것보다 몸으로 사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바보 같더라도 그 길만이 기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성은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기적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기적은 무식함과 비논리와 비합리의 극치다. 기적은 신앙의 열매이지 이성이 기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요단강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만 갈라진다. 머리로 계산하면 기적은 없다. 몸을 던져라. 그래야 강물이 갈라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그 영역을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 계산중이다.

우리 공동체는 그동안 기적의 공동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나는 요즘 머리를 굴리고 있다. 나섬의 미래를 여기서 종지부를 맺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전설을 만들고 기적을 일으키는 공동체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굴린다.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기 전의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를 받아 안전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요단강에 몸을 던지듯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전할 것인가?

언제나 안전함은 좋다.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하고 걱정이 없어지니 하루하루가 어려움 없이 지내는 그런 삶은 한편 경제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 안전한 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다. 나도 안전하게 살고 싶고 편안하게 누리고 싶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안전하고 편안한 것은 재미가 없다.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삶은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만약 삶에 대해 그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전만을 추구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하나님과 조우하고 그분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은 이들은 결코 안전하고 편안하게만 살아서는 안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안전함과 편안함과 결별하려 한다. 또다시 이야기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머리는 그만 굴리고 요단강 물에 몸을 던지듯 나도 그 제사장들처럼 믿음 하나만으로 역사를 만들고 싶다. 다시 몸을 던진다. 삶을 맡긴다. 미래를 이야기로 채우고 싶어 다시 도전한다. 몽골학교를 만들고 나섬을 만들고 기적을 체험했듯이 또 하나의 기적을 위하여 앞으로 발길을 내 던진다. 요단강 물에 몸을 던진 이들이 요단강이 갈라지는 그 짜릿한 기적을 체험했듯이 나도 그렇게 해서 요단강을 건너고 싶다.

 

 

요단강의 기적을 만들려면 계산을 중단하라.

나는 오늘부로 계산을 중단한다. 머리 굴리는 것도 중단한다. 머리는 비우고 몸과 마음으로만 살아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요단강을 건너야 진정한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광야였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얻었던 것만을 기억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나야 진짜 가나안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광야의 기적은 황홀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기적만을 기억하며 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이게 진짜다. 무섭고 두려운 강물이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는 기적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건너가라 하신다. 몸을 드려야 기적이 일어난다.

머리 굴려 계산하고 싶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지지만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머리를 비운다. 마음과 몸으로, 믿음으로만 다시 시작한다.

아직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들은 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가야할 길이다. 다시 길을 개척하고 미래를 꿈꾼다. 가나안이 보이는 길목에서 나는 요단강 앞에 서 있는 중이다. 무섭지만 설레기도 하다.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궁금해서 빨리 요단강에 몸을 던져 버려야겠다.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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