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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이야기

   
성서와 노마드 경제2 / 야곱 (1)


창세기 28 : 10 - 22   
창조적 노마드가 되라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면서까지 성공과 축복을 갈망하는 야곱은 눈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하는 나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준다. 과연 어느 누가 야곱처럼 그렇게까지 성공하고자 할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야곱의 열정과 집념이 부럽다. 그러면서 문득 성공을 향한 그 정도의 집념도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야곱의 약삭빠름과  성공에 대한 의지가 이해되기도 한다.
인간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의지와 집념으로 바꾸는 존재다. 인간이 굳이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성공을 꿈꾸는 인간만이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꿈꾸거나 바라지 않았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성공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바라며 그 성공의 삶을 간절하게 소망한 사람이었다. 

야곱은 장자가 아닌 두 번째 아들이다. 큰 아들이 아닌 두 번째라는 현실은 야곱에게는 장자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장자만이 상속권과 축복권을 가지던 그 시절에 야곱은 이미 현실적 한계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에서가 죽기 전에는 죽어도 큰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다. 에서가 어머니 리브가의 자궁에서 먼저 나와 형이 되고 야곱은 그 형의 발목을 잡고 나와 동생이 되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그들 사이엔 서로 장자가 되기 위한 다툼이 있었나보다. 그만큼 장자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재산과 축복권의 상속이 장자에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야곱에게는 이미 그런 권한이 없었다.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우리가 운영하는 몽골학교 아이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왜 나는 몽골에 태어나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물음이다. 가난한 몽골에 태어나 한국에 와서 일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느끼는 절망감 같은 것이다. 하긴 나도 어렸을 적에 왜 나는 가난한 부모와 가정에서 태어났는지를 물으며 자랐으니 우리 몽골아이들의 물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아픔도 상대적이다. 만약 13세기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에 태어났다면 몽골인은 세계시민이며 다른 민족이 가장 부러워하던 사람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때는 일등 국민이던 사람들이 지금은 가난하고 힘없는 국가의 국민으로 전락한 것을 보며 인생도 국가도 역사도 절대적 강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겠다. 태생적 한계라는 말 즉, 태어날 때부터 인생은 규정 되는가 라는 물음은 요즘 우리 사회의 소위 금수저,  흙수저 논란과 비교할 수 있다. 이제 개천에서는 용이 나올 수 없다는 자조 섞인 소리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패배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태생적 한계란, 결코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지만 나는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큰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각장애인 1급이다. 이주민 목회를 하면서 잃어버린 육신의 눈은 나를 괴롭히고 이제는 정말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밤새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정말 힘들고 아파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다. 나는 매일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 정상적인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음은 분명하고 나는 사회적으로 장애인이라는 낙인 아닌  낙인을 갖고 살아간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 풀 접고 살아야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자존심 상하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의 이 한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죽는 날까지 넘어갈 수 없는 절대적 한계와 장애를 가진 나는 야곱을 생각한다.
금수저도 흙수저도 있을 수는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장자로 태어나고,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그런 환경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성서의 가르침 때문에 나는 여전히 희망과 가능성을 주장하고 벽을 허물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야곱으로 돌아가자.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장자가 아닌 차자였다. 상속권도 축복권도 없는 그런 인생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형 에서가 있는 한 야곱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야곱은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넘어 설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다.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에 맡겨 살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거슬러 더 높이 올라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각자의 선택이고 결단의 문제다. 여기서부터 삶은 달라지는 것이다.
야곱은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자포자기할 수 있는 조건에서 야곱은 미안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장자의 권리와 축복권을 갖고 싶었다.
여기서 형과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성공을 이루려는 야곱의 사기성과 약삭빠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결국 야곱의 도전은 실패한다.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쳐서는 성공할 수 없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성공하고 싶었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주어진 운명과 한계를 인정하며 살라하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까지 성공하는 것을 허락하시진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라는 것인가? 여기 하나의 길이 주어진다. 의도하지 않았던 길이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법이다. 그것은 노마드가 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현실에서 다투고 갈등하며 싸울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라는 것이다. 
게임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 형과 경쟁해서 이기는 삶이 아니라 경쟁 없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 주어진 게임의 룰에서는 이길 수 없다. 이겨서도 안된다. 이것은 전쟁이다. 레드 오션의 소모적 다툼일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야곱의 성공은 에서와의 경쟁이 아니라 야곱만의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환경과 조건을 바꾸는 것이다. 주어진 게임의 룰이 아닌 야곱이 만드는 게임의 룰을 통한 새로운 도전이다. 한마디로 벤처의 삶이다.

야곱만의 블루오션을 살아야 성공한다. 에서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이것은 관습이며 문화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주어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질서와 룰을 만들 줄 알아야 야곱이다. 속이는 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라는 말이다.
야곱의 성공은 에서와의 경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오직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서만이 가능했다. 이것이 창조적 노마드의 삶이다.

창조적 노마드

창조적 노마드 유목민이 되어야 성공한다. 야곱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야곱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야곱이 우리의 모델이다. 태생적 한계와 성공할 수  없다는 운명에 빠진 우리에게 야곱은 새로운 대안 모델이다. 야곱에게서 그 길을 배워야 한다.   
나는 가장 낮고 소외된 유목민 나그네 목회자이며 동시에 가장 절망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내 삶은 우울하고 고독하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힘들었다. 물론 그 고통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경쟁의 목회가 아닌 창조적 노마드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노마드 목회자의 삶이란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나만의 인생살이다. 누구도 하지 않았던 창조적인 목회자의 삶이다. 주어진 장애인이라는 운명도 더 이상 나를 제한할 수 없다. 나는 그 어떤 존재의 한계에서도 포기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로 했다. 새롭고 창조적인 미래를 꿈꾸고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만드는 삶을 살아간다. 게임의 룰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운동장을 만들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게임의 룰을 만든다. 이것이 야곱에게서 배운 창조적 노마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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