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했다. 의사가 암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16개 조직을 떼어 낸 것 중 3개의 조직에서 암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술이 필요할 것 같다고 의사는 무덤덤하게 말한다. 그가 환자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갑자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이제 나도 새 인생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이라고 말하는 의사 앞에서 웃음이 나올뻔했다. 이제 내게 새로운 기적이 시작될 것이라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를 만나기 전에 나는 예견된 미래를 상상했다. 사실 그것은 결정된 미래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암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전설로 만드시려는 섭리라고 믿고 싶었다.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를 깊이 고민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내 몸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내게 비현실적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니 준비하고 살았어야 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살아야 했다.
수면제의 효과가 떨어졌는지 잠이 깼다. 몇 시인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보니 12시도 채 되지 않았다. 불과 두서너 시간을 잔 것이다. 그래도 정신이 멀쩡하니 무척이나 긴장을 했나보다. 다리는 골절되어 걷지 못하고 몸 안에서는 암이 자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새로운 상황에 또 적응하려니 마음이 무겁다. 내게 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는 것일까?
원인 없는 일들은 없다. 모든 상황은 전후 관계가 분명하다. 다시 생각하니 이것은 은혜의 또 다른 이름임을 확신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를 지키시려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느껴진다.
눈을 가져가신 것도, 몽골에서 다리를 다치게 하신 것도, 그리고 암세포를 내게 주신 것도,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정말 나는 그것을 믿는다. 순간순간 주님의 말씀이 고난에 묻어 내게로 왔다. 아프지만 그것은 은혜였고 그 은혜로 나는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그 은혜의 효과가 떨어질 때쯤 주님은 다시 또 다른 고난의 은혜로 나를 깨우치신다. 고난은 은혜의 약이다. 나는 그 약을 먹고 산다. 고난이라고 부르는 그 고통의 은혜로 나는 살아왔다.
나와 나섬 그리고 몽골학교를 지키시려는 주님의 거대한 섭리가 여기에 숨겨져 있다.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믿을 수 없고 천방지축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나를 멈추게 하신 것이다. 세상을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만 살라고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엉뚱하여 인간의 눈으로 좋아 보이는 것만을 만드시지 않는다. 토기장이 주님은 주님의 생각대로 우리를 주무르고 흠을 내시며 때로는 깨어진 토기를 만들기도 하신다. 그것이 오늘의 나다. 나는 흠이 많고 여기저기 깨어진 작품이다. 예술가의 손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 다르다. 나라는 작품은 애초부터 울퉁불퉁 기이한 존재로 설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찌그러지고 상처 난 작품도 걸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전설로 만드시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