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었다. 다문화와 세계화라는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그것이 새로운 선교적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흔히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속도도 방향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속도와 방향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21세기는 속도의 시대다. 누가 속도를 지배하는가는 기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민감한 문제다. 방향과 속도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화와 다문화라는 방향은 확실하다. 세계화와 다문화라는 트랜드는 미래사회는 물론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변화를 무시하려는 태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고민이다. 특별히 세계화와 다문화라는 변화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변화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은퇴자들에게 있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속도의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엘빈 토플러는 속도의 충돌이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한다.
속도의 충돌이란 일정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 도로에서 앞서 가는 차가 제 속도로 달리지 않으므로 벌어지는 충돌 현상이다. 시속 100Km를 달려야하는 도로에서 시속 10km로밖에 달리지 않는다면 뒤에서 따라오는 차량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변화의 속도를 가장 잘 따라가는 집단은 기업이다. 기업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므로 돈의 변화에 예민하다.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빨리 알아차려 필요한 것을 제때에 공급하는 것이 돈을 버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업인이 세상의 변화를 가장 잘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시장이나 기업만큼 변화를 잘 따라가는 집단은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비영리민간단체 NGO다. 시민사회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빠르게 반응한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과 기업 혹은 비영리민간단체들과 달리 속도에 뒤떨어져 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대표적인 부류가 학교와 공무원이다. 국가는 언제나 국민들보다 앞서지 않는다. 특별히 공무원들은 결코 앞서 변화를 이끌어 가지 않는다. 이들보다 더 심각한 사람들이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은 가장 늦게 법을 제정하거나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의 문제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늦고 심각한 문제의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다.
한국교회는 속도의 충돌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그 속도의 충돌이 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선교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감당하여야 할 교회는 여전히 속도를 내지 않는다. 변화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선교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양태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세상 속에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변화와 요청에 가장 빠르고 민첩하게 반응하여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변화를 무시하려 한다. 의도적인 무시인지 아니면 무지에서 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그것은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상을 등진 형국이다.
이런 추세로 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우리 교회는 비판을 넘어 비난과 무시,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세상이 어디로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할 시점이다. 세상보다 앞서 나아가지는 못해도 세상이 가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변화의 속도에 근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여야 한다.
세상은 다문화와 세계화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세계화와 다문화라는 변화의 흐름에 대응하여야 한다.
21세기는 세계화와 다문화의 세상이다. 전세계의 수많은 이들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국가를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를 새로운 노마드 유목민의 시대라 부르는 것이다.
2015년의 매킨지의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전세계의 2억4천700만 명이 흩어져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다한다. 이 숫자는 현재 합법적인 이민자의 숫자이므로 실제로 일시적으로 머물거나 혹은 비합법적으로 살아가는 이주민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족히 5억이 넘어설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분명 이주민의 시대 즉 노마드 유목민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언제든지 흩어지고 모이는 전형적인 유목민의 시대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나는 지금 인천공항을 통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난 이들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듣고 있다. 하루에도 10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로 흩어져 나아간다는 소식이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아간다. 젊은이들은 여행이 일상이 되어 언제든지 필요하면 출국을 한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이젠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들은 또 어떤가? 일 년에 천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고 있다. 관광은 물론이고 다양한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세계화와 다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도 바뀌어야 한다.
세계선교는 우리의 사명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신 선교적 사명은 기독교 존재의 목적이기도 하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위한 성도의 삶은 그 자체로 사명이다.
지난 2000년 동안 선교는 땅 끝까지 찾아가는 선교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선교는 다르다. 땅 끝에서 온 사람들을 선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목민들이 흩어져 이주하는 곳으로 따라가는 유목민 선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시시때때로 거주 공간을 옮기고 있다면 선교사도 그들을 따라 움직이고 이동할 줄 알아야 한다. 유목민 선교란 바로 그런 선교다. 어느 국가에 한정된 선교가 아니라 이주민 유목민들이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함께 이동하고 선교하는 일종의 순회선교다. 나는 그것을 ‘장터선교’라 부른다. 마치 시골에서 장이 서는 날이면 장날을 찾아 난장을 펼치던 우리의 장터를 생각하며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은퇴자들에게 이주민 선교와 더불어 장터선교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 기회는 선교적 기회임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는 여행과 의미있는 노후생활까지 가능하게 하는 다목적 선교의 기회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적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저렴한 비용으로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기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나는 지금 뉴라이프 선교회의 회원들과 더불어 ‘선교와 여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미션 하이웨이를 삶으로 실현하고 있다.
장터선교사가 되는 뉴라이프 선교사
뉴라이프 선교회는 동대문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유목민이 모여드는 전세계로 찾아가 선교한다. 동대문을 넘어 전세계 즉, 이주민 노마드가 있는 곳이 뉴라이프 선교회의 선교지다. 그래서 뉴라이프 선교회 회원들은 장터선교사로, 때로는 유목민 선교사가 되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유연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김혜옥 선교사와 최영자 선교사
김혜옥 선교사는 미국의 시애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의 이주민 선교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찾아온 60대 중반의 시니어 선교사다. 뉴라이프 선교회에서 비전스쿨을 수료하였고 뉴라이프 선교회의 멤버로서 왕성하게 선교 사역을 하였다. 대부분 이주민 사역에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뜬 이들은 이주민의 삶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그네로 살아본 이들이다. 나그네의 삶이란 언제나 고단하다. 그래서인지 특히 미국이나 호주에서 이민자로 살던 이들이 이주민 선교를 위하여 많이 찾아온다. 김 선교사도 그런 분이다. 자신이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이주민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고, 한국에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나섬을 찾아 연락을 하고 찾아온 분이다.
최영자 선교사도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신 분이다. 최 선교사는 한국에 찾아온 이주민 선교를 위하여 일 년에 한번 이상 나섬을 찾아와 나섬의 인도팀 협력 선교사로 섬기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터키-그리스 무슬림 난민 선교공동체
터키-그리스 무슬림난민 선교는 전이해가 필요하다. 다음 장에 소개하겠지만 호잣트라는 이란계 한국인이 터키의 이스탄불에 파송되어 터키로 넘어온 무슬림 난민들 특히 이란과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을 선교하고 있다. 그의 선교 영역은 현재 터키를 넘어 그리스 아테네에 몰려있는 무슬림 난민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
호잣트 선교사의 무슬림 난민 사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슬림 선교란 얼마나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가! 이는 현지에서 이슬람 선교사로 살아본 이들이라면 거의 모두 동일하게 고백하는 사실이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사역이 이슬람 사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선교는 지금까지 투자하고 집중한 것에 비하여 열매가 많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선교현장에 있으면서 이슬람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들 대부분 한결같은 고백은 이슬람 선교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과연 무슬림 선교는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슬람 지역으로 파송되어 선교해본 사람이라면 그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슬람 선교를 멈출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 해답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전략 속에 숨어있다. 이슬람 지역에서 탈출해 나온 난민들을 선교하는 전략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슬림 선교의 대안이며 가장 확실한 기회다.
하나님의 선교전략은 ‘집과 고향을 떠나온 이들을 통한 선교’라고 나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바 있다. 다시 말하면 성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니라 길 위로 올라와 집 떠난 이들이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성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사용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포기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사람들 중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은 이들은 모두 길 위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리브가, 야곱과 요셉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모세와 바울까지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으며 광야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노마드 유목민으로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점이 하나님이 쓰시는 이들의 공통점이다. 길 위의 인생들은 집과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다. 지금의 이주민과 난민, 탈북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난민 문제다. 특별히 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전쟁과 테러를 보라.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나는 테러와 내전이다.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에서의 IS에 의한 테러다. 같은 무슬림들끼리 테러를 한다. 미국과 아프카니스탄이 전쟁을 했고 이라크도 마찬가지로 전쟁 중이다. 물론 그 안에는 오랫동안 겪어온 갈등과 내전의 이유가 있다. 어쨌든 같은 무슬림들끼리의 내전과 테러로 수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 그들이 바로 난민들이다.
이란은 미국으로부터 오랫동안 경제적 봉쇄를 당했다. 이란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그들은 자국 안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경제적 난민들을 비롯하여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경계를 넘어야 했다. 국경을 넘고 집을 나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의 터키로 들어와 초대교회의 일곱 교회 중 하나였던 서머나 교회가 있었던 이즈밀을 거쳐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의 아테네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 난민들의 이동 루트를 공부하면서 난민들의 이동경로를 중심으로 그들이 움직이는 길목이 선교지임을 깨달았다. 바로 그 중심지가 터키의 이스탄불과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감사하게도 일찍이 나섬은 그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호잣트라는 이슬람 출신의 선교사를 2014년 6월 이스탄불로 역파송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선교적 전략은 성공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있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무슬림들을 선교하기 시작했다. 많은 무슬림들이 복음을 듣기 시작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리스에 몰려있는 무슬림 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바울이 본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은 ‘바다를 건너와 도와 달라'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간절한 소리를 들었다. 무조건 호잣트 선교사를 데리고 그리스로 갔다. 아테네에는 이미 난민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엄청난 무슬림 난민들을 보았다. 2016년 초순이었다. 그곳이 선교지임을 직감했다. 뉴라이프 선교회 회원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회원들과 함께 터키와 그리스 땅으로 들어온 무슬림 난민들을 선교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저 지금의 터키-그리스 무슬림 난민 선교공동체가 되었다.
지금 뉴라이프 선교회의 회원들 중에는 신광순 권사를 비롯하여 이슬람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약 40명 정도의 회원들이 각자의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터키와 그리스의 무슬림 난민들을 섬기며 선교하고 있다. 나는 그들 모두를 무슬림 선교를 위한 ‘장터선교사’라 부르고 싶다. 그렇게 불리어도 결코 과하지 않은 진정한 시니어 선교사들이기 때문이다. 무슬림 난민들은 언제 어디로 떠날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적지는 물론 유럽이다. 독일을 비롯하여 프랑스와 영국 등 그들이 가고픈 나라들은 모두 유럽 국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시 그들을 불러 모으시고는 마치 가두리 양식장의 물고기들처럼 가두어 두셨다. 우리에게 무슬림을 선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지금이 선교할 때다. 무슬림 선교는 지금이 기회다.
뉴라이프 장터선교사들이 터키와 그리스로 달려가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장터선교사들은 자신의 고향과 국가를 떠나온 무슬림 난민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선교하고 돌아온다. 그들은 그렇게나 어렵다는 이슬람 선교의 알곡들을 거두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마치 장이 열리는 곳에 장사꾼이 찾아가듯이 시니어선교사들은 난민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선교다. 이러한 선교가 미래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