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선교사님들을 다섯 명이나 만나면서 남인도에서 북인도까지 한 번에 둘러보려는 욕심은 나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다. 아무리 천천히 하라고 해도 나는 어쩔 수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한 번에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조급증은 여전히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 일행은 다섯 분의 선교사님들을 차례로 만나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남인도에서 북인도까지 돌아다녔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는 것도 특이할뿐더러, 다섯 명의 선교사님들도 한 번에 남에서 북까지 돌아보고 싶다는 우리의 요구를 다 들어준 것 또한 특별하다. 말려도 될 것 같지 않아서였겠지만 사실은 지독히도 피곤하고 힘든 일정이다. 젊은 청년들도 감당 못할 일정을 소화하느라 우리 일행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었을까? 그런데 나는 한 번에 다섯 분의 선교사님들을 만나면서 매우 재미있고 즐거웠다. 인도 선교를 보는 눈이 각자 서로 다르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말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말이 떠오르고, 인도라는 나라가 크긴 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의 눈이란 다른 것을 보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본다. 그러면 본다는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보고는 있지만 그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을 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의심하여야 한다.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만의 한계와 이미 주어진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보는 것이다. 나는 보는 것을 의심하기로 했다. 보지 못함으로 본다는 것에 대하여 그 진실됨을 크게 믿지 못한다.
통계조차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에서는 정말 무엇이 옳은가를 모르겠다. 통계란 주어진 수치가 아니라 해석이다. 통계를 보고 사회적 현실과 미래를 상상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학문이 통계학이다.
그런데 그 통계마저도 다르다. 아니 해석이 다르다. 그것이 보는 것의 한계다. 보는 것의 차이가 그 해석의 차이다. 해석에는 자기만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한 객관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선교사들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사례다. 선교에는 왕도도 완전함도 교과서도 없다.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이 전부이고 그것만이 진실 되다. 나머지는 가끔 참고할 것에 불과하다.
판가즈와 함께 하려는 인도 선교가 그렇다. 우리가 가면 그것이 길이다. 누구도 우리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새로운 창조적 선교를 하여야 한다.
처음부터 역파송을 상상하고 그 개념을 만들어 가면서 이런 전략적 선교는 창조적이며 누구에게도 그 의미와 형식을 지원받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으로 나는 처음부터도 혼자였다. 선교사는 그 자신의 지역과 시간 안에서만 선교를 말한다. 뿐만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과 후원자들을 고려한 선교적 수식어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위선도 거짓도 아니지만 선교사의 실존적 한계와 관계되어져 있음으로 그 안에서 듣는 이는 스스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듣고 보아야 할 것은 본질이며 커다란 물줄기다.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이면의 본질이며, 나무가 아니라 숲의 모양이다. 가야할 방향과 목적지를 바라보는 것만이 중요하다. 인도에서 만난 다섯 분의 선교사님들은 그들만의 선교신학이 있고 그들 각자가 보는 선교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있다. 나누면 좋은 것들이다.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은 판가즈와 함께 하는 인도선교의 미래다. 어떤 전략으로 인도에 들어갈 것인가? 그의 가족들과 인도의 부모님들의 관계설정에서부터 인도의 기존 교단과 목회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한국 선교사들과의 연결고리는 어떤 형식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판가즈의 잠재력과 한국적 토대 위에서 자란 인도 목회자로서의 역할 등 너무도 고려해야할 숙제가 많다.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이 글을 쓰며 기도와 고민을 한다. 주께서 그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다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