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우리는 분단의 길을 걸어왔다. 1948년 남과 북이 각각 서로 다른 이념의 국가를 세우고 1950년 6.25전쟁을 겪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다. 이런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의 혼란 속에서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를 비롯한 친일행적, 이와 동시에 북에서 당해야 했던 종교박해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념으로 하는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지원 아래 국가를 세워야 했음으로 기독교인 장로였던 이승만과 미국이라는 그늘막은 한국교회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복잡한 이념과 국제적 변화로 인해 교회는 선택의 여지없이 편들기와 자기 보호본능이 적절하게 작동된 채 자리를 잡아갔다. 이는 우리 한국교회 역사의 비극이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잉태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차라리 그때 우리 한국교회가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의 역사를 용기 있게 회개하고 새로운 민족 교회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으면 어떠했을까? 이념보다 민족의 운명을 더 소중하게 인식했더라면 우리는 오늘의 분단과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교회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반공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1945년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을 앞세운 김일성 체제가 자리를 잡아갔고, 그 혼돈의 시대에 북한의 교회는 반(反)공산주의, 반(反)김일성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특별히 1946년 3.1 운동 기념식을 김일성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교회의 입장은 김일성 체제에 대한 본격적 거부였다. 나아가 교회는 그해 11월 일요일에 북한 체제구성을 위한 최초의 선거를 주일에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교회는 이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당시 김일성의 외삼촌이었던 강양욱 목사가 북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김일성 사이를 오고가며 갈라진 틈을 메꾸기 위해 노력한 사실도 있었다.
그리고 박해는 시작되었고 북의 교회와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은 이를 갈며 남으로 내려왔다. 이를 갈 만큼 처절하게 박해를 받았음으로 그 이후로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도배된 것이다. 1948년 제주 4.3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해 엄청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보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에 이용당한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이며 동시에 북에서 당한 박해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감정적 결과였다. 그 후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반공과 친미라는 이념이 자리 잡았다. 60년대를 지나 산업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회는 부흥과 성장 그리고 독재와 산업화를 적당하게 이용한 결과 전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르게 성장하고 부흥한 교회가 되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생겨났고, 전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한국교회 안에서 생겨났다.
그러는 가운데 분단은 고착되었고 평화는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과 관념이 되었다.
세상은 4차 산업사회로 과학기술의 첨단을 걷고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프레임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990년대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냉전 질서가 깨졌어도 우리에게는 반공과 분단, 그리고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이념에 종속된 분이 아니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교회와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교회를 이념 속에 붙잡아 놓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반공을 신앙과 동일시하며 불행한 과거에 갇혀 지내야 하는가?
평화는 반공과 적대적 관계가 아님에도 평화와 통일을 주장하면 그것은 곧 종북이며 반공을 철회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우리 안에 여전하다.
정말 반공이 우리를 살리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면 우리는 역사의 주체일 수 없다. 반공의 시대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가 살아야할 미래의 절대 가치는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마음의 문을 열고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반공을 넘어 평화의 미래를 살아가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그것이 곧 우리 교회가 민족의 운명에 동참하려는 몸부림이며 슬프고 아픈 과거를 치유하는 길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잘못을 인정하라는 식의 비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 되어 반공이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나 미래의 평화를 위한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 손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며 예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의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