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개교식을 가졌다. 물론 그 전에도 아이들이 모여 함께 노래를 배우거나 한글공부를 했지만 ‘재한몽골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것은 그때였다. 8명의 아이들로 기억된다. 몽골 아이들과 홀트아동복지회, 그리고 이일모 장로님을 비롯하여 몽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오신 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재한몽골학교의 출발을 알렸다. 지금과 같이 큰 학교가 되리라고는 단 1%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뿌려진 씨앗은 계속 자라나 지금의 학교로 발전된 것이다.
정식으로 학교를 개교하니 몽골 아이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 한 일이 지하실 작은 공간을 나누고 또 나누어 칸막이로 교실을 만든 것이다. 몇 개의 교실을 억지로 만드니 그런대로 몇 개의 공간이 생겨났다. 불과 몇 주 만에 20명이 넘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공간도 부족하고 그나마 학교를 운영할 자금도 부족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우리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아이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재원도 부족하고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여야 했지만 그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에 나타난 어느 집사님께서 자신의 건물이 광장동에 있는데 그 지하실을 무상으로 쓰라고 하였다. 광장동으로 우리가 이사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광장동은 내게 고향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광장동에 살면서 광장초등학교를 다녔고 모교회가 광장교회다. 게다가 장로회신학대학이 광장동에 있으니 광장동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런 광장동에 우리 학교가 처음 이사를 했다. 지하실이었지만 30평 남짓한 지하실을 꾸미고 칸막이를 하여 그런대로 작은 대안학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학년과 교실은 칸막이로 구분하였다. 바로 옆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마치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리는 그런 학교였지만 행복했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오면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작지만 교무실도 만들었다.
점심은 강변역 나섬공동체에서 만들어 광장동까지 실어 날랐다. 아이들은 계속 늘어나고 선생님들도 있었으니 매일 먹는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젠 풀타임 스텝이 필요했다. 초기에는 인건비 등 모든 부분이 어려운 까닭에 우리 공동체의 권성희 목사님이 책임을 맡아 수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울란바토르시의 엥흐볼트 시장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몽골에서 울란바토르 시장의 정치적 영향력은 우리의 서울시장보다 막강하다. 그만큼 울란바토르시가 몽골의 중심이었고 실제로 울란바토르 외에 다른 도시는 도시라고 할 수 없는 유목민의 사회였으니 울란바토르 시장의 힘은 클 수밖에 없다. 엥흐볼트 시장은 그 이전부터 나하고는 친구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가 처음 서울시를 공식 방문하게 되었을 때 재한 몽골인과의 간담회를 내가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그때에 만난 인연으로 지금의 울란바토르 선교교회의 부지를 불하받았으며, 가초리트라는 울란바토르 외곽에 지은 수양관을 정식으로 허가해주기도 하였다. 지금 울란바토르 선교교회가 있는 땅은 울란바토르에서도 가장 요지가 되었다고 하니 그때의 만남과 교제는 몽골 선교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역사적 만남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인연을 맺어온 엥흐볼트 시장이 우리 몽골학교를 찾아오기로 한 것이다. 200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와 광진구의 공무원들이 수행한 공식적인 방문이었다.
광장동 작은 골목의 어느 건물 지하실이 학교였다. 상상해 보라. 분위기가 어떠했을까? 엥흐볼트 시장을 데리고 내가 앞서 지하실로 내려가며 안내를 하는데 엥흐볼트 시장이 멈칫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통역하던 몽골자매가 하는 말이 몽골에는 지하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다고 답해준다. 우린 함께 웃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니 낮은 조명이 전부다. 컴컴한 지하실에서는 곰팡이 냄새도 난다. 칸막이로 만들어진 교실이었으니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소리는 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 칸의 칸막이 문을 활짝 여니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앉아 있던 아이들이 울란바토르 시장에게 “센베노~”하면서 인사를 한다. 울란바토르 시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워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마치 감전된 것처럼 잠시 말을 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지하실에 가득했다. 40명이 넘는 아이들의 학교가 그렇게 운영되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울란바토르 시장은 밖으로 나오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물음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학교입니까?”
그의 물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의 모습과 말투, 그리고 그 분위기를 상상해야 그 물음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이런 열악한 시설로 학교를 운영하느냐는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를 운영하는 당신이 정말 대단하고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때 진심으로 몽골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 나를 깊이 인식하게 된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2001년 6월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법인 몽골울란바타르 문화진흥원이 세워질 때에 엥흐볼트 시장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그는 나를 이해했고, 나도 그를 신뢰했다. 몇 년 후 그는 몽골의 총리가 되었고 내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에는 나와 일행 모두를 영빈관에 초청해 큰 잔치를 배설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 몽골의 중요한 정치인으로 차후 몽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변해있을지, 뿐만아니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지 아무도 모른다. 엥흐볼트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그는 지금도 여전히 친구다.
함께 어울려 살며 그리고 그 진정성이 피차 확인되고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 간에 종교가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를지라도 언제나 친구처럼 역사의 한 복판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제부터 언급하는 또 한 명의 인사는 몽골 선교에 있어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그와의 만남은 정치적인 것으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몽골을 사랑했고, 우리 공동체를 인정했다. 그는 당시 광진구 구의원이었다. 내가 유승주 전시의원을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그를 만나고 보니 마침 나의 초등학교 선배가 아니던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 후로 그는 몽골 통(通)으로 꼽히는 서울시의원으로서 엥흐볼트 시장과는 나보다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가 구의원으로 있을 때에 광진구청장은 정영섭 장로님이었다. 그렇다! 역사는 그렇게 만나지는 것인가 보다. 나와 유 의원 그리고 정영섭 구청장이 만나니 세상에 못할 일이 없었다. 정 구청장님은 전설 같은 분이다. 평생 공직자로 사신 분으로 특히 그는 광진구를 비롯해 서울시 여러 곳에서 구청장으로 오랫동안 일하신 분이다. 거의 30여년을 구청장으로, 관선에서 민선까지 구청장의 전설이며 행정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분이다. 그런데 마침 그분이 우리학교가 있던 지역의 구청장이었고 게다가 성결교회의 장로님이 아니시던가!
내게는 아버지 같은 연배의 구청장 장로님, 초등학교 선배인 구의원 등 주변의 인사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한 식구처럼 우리를 돕기 시작했다. 특히 몽골 사역에 있어 광진구의 소중한 분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광장동의 지하실이 너무 협소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들린 것은 그곳으로 이사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구청장님이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연락을 보내왔다. 식당에 가보니 구청장님을 비롯하여 구청의 간부들 그리고 유 의원까지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정 구청장님은 나에게 학교 운영이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는 학교에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공간도 매우 협소하고 운영도 어렵다고 답했다. 점심식사가 끝나갈 무렵 구청장께서 재정국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재정국장, 혹시 돈이 있으면 몽골학교 임대비용 좀 대줍시다. 학교가 좁다니 조금 넓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한 일억쯤 구청에서 보조해주면 어떻겠소?"
나는 먹던 점심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놀랐다. 구청장님의 그 말 한마디가 몽골학교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재정국장이던 박영준 국장님은 그 후로도 몽골학교를 여러 측면에서 도왔던 분이다. 지금은 퇴직하여 하남시에 살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 1억이라는 돈은 컸지만 막상 학교 건물을 임대하려하니 마땅한 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집값이 많이 올라 1억으로 건물을 얻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몇 주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왜 학교 건물을 임대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염치없지만 1억으로는 집을 구할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구청장님이 주신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지금도 정 구청장님의 사랑과 배려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구청장님은 1억으로 안되면 1억을 더 주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니까 총 2억이라는 돈을 지원받게 된 것이다. 지금도 큰 액수인데 그 당시에 2억이라면 얼마나 큰돈이던가?
그런데 2억으로 학교 임대를 하느니 차라리 땅을 사서 장기적으로 학교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자는 내부의 여론이 있었다. 고민이 되었다. 임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좀 힘들어도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부지를 마련하여 당장은 아니더라도 학교를 짓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광장교회의 서 집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광장동에 집도 있고 텃밭도 있는 곳이 나왔는데 그 집을 사서 학교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가격을 물으니 5억이 조금 안 되는 정도라 한다. 땅이 100평이고 그 안에 집도 있으니 나중에라도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억 정도만 더 있으면 그 집을 사서 리모델링하여 학교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회 재정을 보던 권 목사님에게 말하고 무리가 되더라도 미래를 위하여 그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어렵지만 구청에서도 돕고 있으니 어떻게든 힘을 모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광장동 골목 끝자락 광장중학교 후문 앞에 지금의 ‘나섬 선교센터’가 있는 그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학교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집은 2층 양옥이었으니 겉으로는 번듯했지만 오래되어 낡고 모든 것이 열악했다. 그러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제 누가 나가라고 눈치 주는 사람 없을 것이니 그것이 마냥 좋았다.
뚝섬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강변역의 선교회로 옮기면서 고생스러웠지만 주님의 은혜가 충만했었다. 2억 5천만 원을 주고 강변역 유치원 건물 지하에 전세로 옮겨오기까지 그것도 외환위기의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눈물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몽골학교를 위한 우리만의 공간을 갖게 되다니! 한없는 주님의 은총에 나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