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초원에서 교회개혁을 생각하다
나는 몽골 초원을 좋아한다. 특히 초원의 유목민 가정을 방문할 때면 왠지 내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하게 된다. 그들 유목민의 삶에는 어떤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에게서 삶의 진정한 자유와 소유의 한계를 경험한다.
집이라고는 한 식구 잠자고 생활하기에도 불편할 것 같은 작은 게르가 전부이고, 그 안의 짐이라고는 중앙의 난방과 조리를 위한 난로와 사방의 작은 침대 그것도 딱 일인분의 침대가 고작이다. 그 외에 우리나라 유치원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의자 몇 개가 더 있으면 그는 그만큼 충분한 소유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몽골초원에서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사는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다. 물론 요즘은 태양광 발전을 위하여 게르 위에 모듈을 달고 사는 사람도, 혹은 빠른 이동을 위하여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유목민의 삶은 단순하다.
단순함은 유목민을 유목민답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유목민이 짐이 많거나 집이 커서는 이사할 수 없으니 불편함을 넘어 유목민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목민이고 교회는 나그네가 순례자 되어 하나님 나라로 길 떠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치 초원의 유목민과 다름아닌 존재들이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유목민처럼 살아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런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가?
이 세상에 성을 쌓고 그것에 영원히 안주하려는 욕망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나섬의 목회가 유목민 목회여야 하는데 자꾸만 나도 성을 쌓고 싶어진다. 이 유혹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때로 깊이 그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다시 초원의 유목민을 찾아가야 한다. 소유를 제한하고 단순함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그들이 옳다.
와튼스쿨의 제라미 러프킨 교수는 그의 책 '소유의 종말'에서 미래 사회는 소유가 아닌 접속과 공유의 시대가 될 것이라 했다. 나는 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한다. 특히 소유의 한계를 말하는 그의 논리에 공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는 것은 이미 미래 사회에서 유연성을 잃어버리게 할 가능성이 높다. 많이 갖고 있으면 우리 몸과 삶은 공룡처럼 비대해지고 그것으로 공룡처럼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역사에서 공룡이 사라진 것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의 먹이를 줄이지 못하는 그 욕망이 공룡의 종말을 맞이하게 했다. 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증거한다. 중세의 교회가 그랬고 유럽과 미국의 교회가 그랬다. 그리고 그 증거는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공룡이 되고 싶어 한다. 공룡이 되고 싶은 교회는 유목민의 삶에서 진리를 배워야 한다. 커지면 빨리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제 살아남는 교회는 작지만 강한 교회다. 단순한 교회, 작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교회가 마지막까지 존재할 것이다. 나는 유목민에게서 그것을 배운다. 언제나 움직일 수 있는 유연성과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단순함이 척박한 초원에서도 유목민을 생존하게 하는 힘이다.
우리 사회의 환경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저출산과 초고령 그리고 이주민의 유입은 필수불가결의 상황이다. 모든 미래학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교회는 공룡의 꿈을 접고 작지만 강한 교회가 되는 일에 전념하여야 그나마 생존할 가능성이 있다. 공룡의 꿈을 깨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두고 보라. 반드시 사라질 것이니 그날은 도둑처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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